
(사진 설명 : 트레몬트 산맥의 거대 밤나무와 제임스 쉘튼(James Shelton)가족(1920년 경). 사진 joegardener(c))
1904년 미국 뉴욕에서 처음 발견된 ‘미국 밤나무 줄기마름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식물 생태계 교란 사건 중 하나다. 불과 40년 만에 미국 동부 전역의 토종 밤나무 약 35억~40억 그루가 고사했다. 이는 고의적인 환경 파괴가 아닌, 19세기 말 아시아산 조경용 밤나무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외래 곰팡이 균이 함께 유입된 ‘검역 실패’가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되돌리려 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눈물겨운 복원 드라마가 지금 미국 동부의 거대한 산맥에서 소리 없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 한때 아팔라치아 산맥의 지배자이자 미국인들의 요람과 무덤을 모두 책임졌던 ‘미국 밤나무(American Chestnut)’의 몰락과 부활은 너무도 극적인 이야기다.
1900년대 이전까지 미국 동부의 숲은 밤나무의 천국이었다. 메인주에서 미시시피주에 이르는 광활한 녹색 벨트에서 서식하던 나무 네 그루 중 한 그루가 밤나무였다. 총개체 수만 약 40억 그루에 달했다. 아파트 10층 높이로 올곧게 뻗은 이 거인들은 썩지 않는 단단한 목재를 아낌없이 내어주며 초기 미국의 철도와 가옥, 가구를 지탱한 경제적 대동맥이었다.
가을이면 대지를 가득 채운 갈색 밤송이들은 가축을 살찌우고 가난한 이들의 겨울 옷가지를 마련해주던 풍요의 상징이자, 숲속 야생동물들의 생명선 그 자체였다. 풍요가 비극으로 뒤바뀐 것은 1904년의 일이다.
아시아에서 수입된 관상용 품종에 묻어 들어온 미세한 곰팡이 균, 즉 ‘밤나무 줄기마름병’이 뉴욕을 시작으로 동부 숲을 집어삼켰다. 면역력이 전혀 없던 미국 밤나무들에게 이는 보이지 않는 사형선고였다. 바람을 타고 번진 곰팡이는 나무껍질의 상처를 파고들어 수액이 흐르는 통로를 완벽히 차단했다.
불과 40년 만에 35억 그루가 넘는 나무가 형체만 남은 채 하얗게 말라 죽었다. 한여름에도 낙엽 하나 없이 유령처럼 서 있던 거대한 고목들의 군락은 인류가 목격한 가장 빠르고 압도적인 생태계 아포칼립스였다. 1941년, 미국 밤나무는 공식적으로 야생 상태에서 멸종을 선언받았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인간의 집념이 만든 기적은 시작됐다. 1983년 설립된 미국 밤나무 재단(TACF)을 중심으로 과학자들과 임학자, 그리고 수많은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하는 ‘백년의 전쟁’이 막을 올렸다. 이들이 선택한 무기는 대를 이어가는 인내였다.
병해에 강한 중국 밤나무와 몸집이 큰 미국 밤나무를 교배한 뒤, 그 자손을 다시 순종 미국 밤나무와 교배하는 고단한 ‘역교배’ 방식을 수십 년간 지속했다. 유전적으로는 99% 이상 미국 밤나무의 완벽한 형질을 유지하되, 오직 중국 품종의 저항성 유전자만을 남기기 위한 사투였다.
나무 한 세대가 자라 검증을 받기까지 3년에서 5년이 걸리는 인고의 세월이었지만 그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곰팡이 독소를 분해하는 유전학적 연구와 곰팡이의 독성을 약화시키는 바이러스 요법까지 동원됐다.
그리고 마침내, 세대를 넘어선 눈물겨운 노력으로 미국 전역 700여 곳의 산림에서 기적 같은 복원의 신호탄을 쏘아 올려지고 있다. 최근 깊은 숲속에서는 인간의 손길을 떠나, 병을 이겨낸 저항성 밤나무들이 스스로 씨앗을 퍼뜨려 자라난 2세대와 3세대 아기 밤나무들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숲이 스스로 치유력을 회복하며 생태계의 일원으로 당당히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미 참나무 중심으로 재편된 숲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고 완벽한 복원을 이루기까지는 앞으로도 100년 이상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 이 거대한 실험은 가능 여부의 단계를 지나 확신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기후변화와 생물 다양성 붕괴라는 암울한 환경 뉴스 속에서 이 대서사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망가진 자연일지라도, 인간의 수명을 넘어서는 세대 간의 헌신과 과학적 집념이 있다면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위대한 희망의 증거다.
향후 100년 뒤, 아팔라치아 트레일을 걷는 미국의 후손들은 머리 위를 가득 채운 거대한 밤나무 숲을 보며 인간이 자연에 건넨 가장 아름다운 도전의 유산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한국밤산업신문=유명근 기자)